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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5. 25世 〉1. <요재공>청당공휘기용묘갈명(靑堂公諱琪瑢墓碣銘)
1. 문헌 목록 〉25. 25世 〉3. <요재공>효자죽포공휘상익비명(孝子竹圃公諱尚翼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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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요재공>운계공휘평규묘갈명(雲溪公諱平奎墓碣銘)
雲溪公諱平奎墓葛銘 公諱平奎初諱平基 字公明雲溪其自號也 貫淳昌高麗大將軍守門下侍中諱璋爲鼻祖 玉川府院君 諡忠獻號農隱諱元吉爲中興祖 與圃牧陶冶幷稱五隱 至我國朝成廟時 有諱彭孫號玄洲 官庇安縣監司憲府執義 是爲公十六代祖也 鳳山公諱泂 休菴公諱民植 玉山公諱炳碩爲曾祖祖考三世 妣珍原朴氏純鎭女 生公于庚子十月十六日寶城郡蘆洞面擧石里上基本第 五男二女中季子 公天禀明敏強記 自幼受庭訓 稍長修學於綾州黃澈源門下經史子集無不涉獵 二十二歲辛酉 鄉校釋菜時 目見 妻父蓮栗軒 公以祭酒事 被逮日警 自覺民族精氣 早事新學 不過月餘 據入中學校 而以家貧之故 終不得遂志 然遷喬雄懷 未嘗一日忘也 二十五歲秋渡海 勤勉做工 探味新思潮 而其親患急歸 歷仕面職 服閱後 以初志不遂 再出滿洲延吉 志于獨立運動 命奇不遇而還鄉 在職郡農會 少焉見光復耳 於是被任建國準備委員長 四十七歲春 被選初代本面長 盡力奉公開設面路 又麗順亂時 力救人命 賴公得生者甚多 玆後歷學校後援會長 農民會長 當六二五戰亂時 退軍焚火面所廳舍 公召募三子姪 拯救戶籍臺帳及面財 五十三歲春 被選面議會長國民會長 五十七歲以後 讓退公職 自娯晚年 公生平 一遵先賢法度 清廉奉公 敎育後進 風化鄉俗 衆望咸歸 眞爲督勵衰世俊傑也 公得老年 盡力於大小宗事及郡史續刊 而探究儒佛仙三道敎理 心得者頗有之 戊午八月九日卒 享年七十九餘他行歷及詩文 載郡誌山陽文會詩稿寶城文學大幹 又有遺集雲溪散稿若干卷 墓在蘆洞面擧石里上基村先山 而丙子移葬于飛離峙馬谷擧石里山二十七番地 依遺志副葬天主實義及雲溪散稿影印本 配密陽孫氏 抗日士人廷燮女 壬寅四月十日 生于 蘆洞錦湖里梨亭 年十七歸于公 生二男二女 性姿仁厚安重 貞淑勤儉 對人敬和 多有内助 癸巳六月九日卒 壽五十三 墓合塋 長男啓昌 以奉敎職四十七年 受功勞勳章冬栢章 娶靈光丁氏鍾春女幸南 育三男六女 次男啓賢 以四一九革命國家有功 受建國褒章 奉職韓國銀行三十年 娶全州李氏鍾相女道一 育三女 長欣淑嫡清州韓景洙 次菊子嫡水原白佑善 繼配全州李氏育一男啓允而未娶公之次胤啓賢氏 好我執友 請銘不得辭 乃銘曰 早事新學 家貧不遂 長也遷喬 時運靡遇 誰怨誰咎 非命則數 可言公者 奉公縣務 遭亂救氓 投烘拯籍 曷云能易 史可載蹟 有子卓功 人言且覿 斯足不朽 餘可略躑 大韓民國七十年 丙子 四月 日 全南大學校 大學院長 政治學博士 密陽后人 朴河一 謹識 운계공휘평규묘갈명(雲溪公諱平奎墓碣銘) 공(公)의 휘(諱)는 평규(平奎) 초휘(初諱)는 평기(平基)요 자(字)는 공명(公明)이고 운계(雲溪)는 공의 자호(自號)이다. 본관은 순창(淳昌)으로 고려(高麗) 대장군(大將軍)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휘(諱) 장(璋)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려말(麗末)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 목은이색(牧隱李穡) 도은 이숭인(陶隱李崇仁) 야은 길재(冶隱 吉再)와 더불어 오은(五隱)의 한분이신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시호(諡號)는 충헌(忠獻)이시고 호(號)는 농은(農隱)이신 휘(諱) 원길(元吉)을 중시조(中興祖)로 한 조선국(朝鮮國)에 이르러 성종(成宗)때 벼슬이 비안현감(比安縣監)과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이신 휘(諱) 팽손(彭孫) 호(號) 현주(玄洲)공이 십육대조(十六代祖)이시다. 증조(曾祖)는 봉산공(鳳山公) 휘(諱) 형(泂) 할아버지(祖)는 휴암공(休庵公) 휘(諱) 민식(民植)이고 아버지(孝)는 옥산공(玉山公) 휘(諱) 병석(炳碩)이시고 어머니(妣)는 진원박씨(珍原朴氏) 순진(純鎭)의 따님이시다. 공(公)은 서기 일천구백년(西紀一千九百年) 경자(庚子) 시월(十月) 십육일(十六日)에 보성군 노동면 거석리 웃터(寶城郡 蘆洞面 擧石里 上基) 본가(本家)에서 오남이녀(五男二女)의 막내로 출생하셨다. 공(公)은 천성(天禀)이 명민(明敏)하고 기억력이 뛰어나(強記) 어려서 아버지에게서 사략(史畧)까지 배우고 열한살(十一歲)에 비로소 학당(學堂)에 나아가 대학(大學)을 읽고 성년(成年)이 되어 능주(綾州) 황철원(黃澈源) 선생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였는데 경서(經書)와 역사서(歷史書)와 제자류(諸子類)와 시문집(詩文集)에 밝으셨다. 공(公)은 천구백이십일년(一九二一年)신유(辛酉)년 이십이세(二十二歲) 가을 보성향교(寶城鄉校) 제주사건(祭酒事件)으로 장인(妻父) 율헌공(栗軒公)등 선비(儒士)들이 일본경찰(日警)에 붙잡혀(被逮) 간 것을 보고 민족정기(民族精氣)를 자각(自覺)하여 일찍 신학(新學)을 배우게 되었다. 광주(光州)에 가서 불과 한달 남짓(不過月餘) 강습을 받아(受講) 중학교(中學校)에 입학(入學)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而山家貧之故) 진학이 불가능하였고 서울에 가서도 내종숙(内從叔) 참판박남현(參判朴南鉉)의 후원(後援)도 어렵게 되자 동경(東京)에 가서 고학(苦學)하리라 결심하셨다. 이십오세(二十五歲) 가을에 일본으로 가서 근로(勤勞)하며 공부(勉學)하여 새로운 사조(新思潮)를 접(探味)하셨다. 이십구세(二十九歲) 봄에 부친의 노환 소식을 듣고 환국(而其親患急歸)하여 면서기(面書記)가 되었고, 양친께서 별세하신후(服뾝後) 이루지 못한 젊은시절의 뜻을 생각하여(以初志不遂) 직장을 사직하고 독립운동 지사를 만나리라.(志于獨立運動) 복약(服藥)을 핑게삼아 만주연길(滿洲延吉)에 갔으나 방도를 얻지 못하고 귀향(命守不遇而還御)하여 군농회(郡農會)에 근무하다가 광복(光復)을 맞으셨다. 해방공간(解放空間)에 건국준비위원회 면위원장(建國準備委員會 面委員長)에 피선(被選)되었고 사십칠세(四十七歲) 봄에 민국(民國) 초대 본면장(初代本面長)을 수임(受任)하여 공의(公義)에 힘을 다하고 면로(面路)를 개설(開設)하였으며 여순(麗順) 군반란(軍反亂)때 인명을 구하는데 고절(苦節)하시고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막으셨다(力救人命 賴公得生者甚多) 그후 학교후원회장(學校後援會長) 농민회장(農民會長)으로 육·이오 전란을 당하여(當六·二五戰亂) 퇴각 북군의 방화(退軍焚火)로 면사무소청사(面所廳舍)가 불타고 있을때 조카와 아들(子姪)로 세사람(三人)이 호적부(户籍簿)를 끌어내어(披出) 면재산(面財)를 구(救)하였다. 오십삼세(五十三歲)봄에 면의회의장(面議會議長) 국민회장(國民會長)에 피선(被選)되었고 오십칠세(五十七歲) 이후에는 공직(公職)을 사양하시고 노년(老年)을 지내셨다(自娯晩年) 공의평생(公生平)은 선현(先賢)의 생애(生涯)에서 교훈을 얻어(一遵先賢法道) 청렴으로 공직에 봉사(清廉奉公)하였고 후진의 양성(敎育後進)과 향리의 교화(風化鄉俗)에 힘써 존경을 받으셨고 난세(難世)에 향방(鄉坊)을 편안(安堵)게 한 분이시다(衆望咸歸眞爲督勵衰世俊傑也) 공(公)은 노년(老年)에 이르러(公得老年) 대소종사(大小宗事)와 군사속간(郡史續刊)에 힘을 다하시고 천주실의(天主實義)로 영생을 완정(完定)하시었다(心得者頗有之) 일천구백칠십팔년(一九七八年) 무오(戊午) 팔월(八月) 구일(九日) 홀연(忽然) 세상을 떠나시니 칠십구세(七十九歲)이셨다. 여타행력과 시문(餘他行歷史 詩文)은 군지(郡誌)와 산양문회시고(山陽文會詩稿) 보성문학대간(寶城文學大幹)에 기록되어 있고 또 유집(遺集)으로 운계산고(雲溪散稿)가 있다. 묘(墓)는 보성군 노동면 거석리 웃터마을(上基村) 선산(仙山)에서 공(公)이 돌아가신 십칠년(十七年)후인 병자(丙子)년에 비리재 몰골(飛離峙馬谷) 거석리 산 이십칠번지(擧石里 山 二十七番地)로 옮겨 모셨다. 이때 유언(遺言)에 따라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부장(副葬)하면서 운계산고(雲溪散稿) 이영본(印影本)도 함께 하였다. 배위(配位) 밀양인(密陽人) 손재녀(孫在女)는 항일선비(抗日士人) 휘(諱) 정섭(廷燮)의 장녀(長女)로 일천구백이년(一九○二年) 임인(壬寅) 사월(四月) 십일(十日)에 노동면 금호리 배남정(錦湖里梨亭)에서 출생하여 십칠세(十七歲)에 시집(出嫁)오셔 이남이녀(二男二女)를 낳으셨다. 성품(性姿)이 인후안중(仁厚安重)하고 정숙근검(貞淑勤儉)하였고 대인경화(對人敬和)하여 내조(内助)에 공(功)이 많으셨고 일천구백오십삼년(一九五三年) 유월(六月) 구일(九日) 오십삼세(五十三歲)에 돌아가셨다. 묘(墓)는 내외합영(合塋)이다. 장남(長男) 계창(啓昌)은 교직에 사십칠년 봉직(以奉敎職四十七年)하여 공로훈장(功勞勳章) 동백장(格栢章)을 받았고 영광정씨(靈光丁氏) 종춘(鍾春)의 딸 행남(幸南)과 결혼(娶)하여 삼남육녀(三男六女)를 두었고 차남(次男) 계현(啓賢)은 사·일구혁명국가유공(四·一九革命國家有功)으로 건국포장(建國褒章)을 받았으며 한국은행(韓國銀行)에 삼십년 근무(三十年勤務)하였다. 전주이씨(全州李氏) 종상(鍾相)의 딸 도일(道一)과 결혼하여 세딸(三女)을 두었다. 장녀(長女) 흔숙(欣淑)은 청주인(清州人) 한경수(韓京洙)에 시집가서 사남일녀(四男一女)를 낳았고 차녀(次女) 국자(菊子)는 수원인(水原人) 백우선(白佑善)에 시집가서 일남사녀(一男四女)를 낳았다. 계배(繼配)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아들 계윤(啓允)을 낳았는데 아직 미혼(未婚)이다 공(公)의 차남 계현(啓賢)은 나와 같이 공부하고 뜻을 같이 한 친구(好我執友)로 명(銘)을 청함에 사양하지 못하였다 명(銘)하건데 일찌기 신학을 일삼았으나(早事新學) 집이 가난하여 이루지 못하고(家貧不遂) 성장하여 외국에 가서도(長也遷喬) 시운을 만나지 못하였으니(時運靡遇)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탓할것인가(誰怨誰咎) 명이 아니라면 운수였도다(非命則數) 공에 대하여 말할수 있는것은(可言公者)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심력(心力)을 다하고(奉公縣務) 난리를 당하여 백성을 구제하고(遭亂救民) 불속에 뛰어들어 호적을 꺼내온것은(披烘拯籍) 어찌 쉬운일이 아니니(曷云能易) 역사에 기록할만 하도다(史可載蹟) 아들들의 공도 드높아(有子卓功) 사람들이 볼만하다 말하니(人言且覿) 이는 오래도록 전하여 없어지지 않을것이니(斯足不朽) 나머지는 생략해도 되리로다(餘可略躑) 대한민국 七十八년 병자(丙子) 四월 전남대학교 대학원장(全南大學校 大學院長) 정치학박사(政治學博士) 밀양인(密陽人) 박하일(朴河一) 근지(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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